살수대첩, 수 멸망 이끌다
앞서 본 역사적 전투는 서양과 중국 역사 속 전투였다. 이쯤에서 우리 역사에서 역사의 향방을 바꾼 중요한 전투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인 살수대첩이 그것이다.
살수대첩은 단순히 30만에 달하는 대군을 물리친 전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중국 왕조 교체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전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긴 중국의 분열 시기를 종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조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주변 세력의 확립에 있었다. 북쪽 돌궐과는 혼인 등으로 인한 혈연관계로 안정된 상태에서 수나라를 세운 문제에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는 동쪽 고구려였다. 그는 고구려를 복속시켜 사해의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려 하였으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고구려는 오히려 과감하게 선제공격을 통해 수나라의 의도를 살피고 견제에 나섰다. 이에 물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를 일으키자 이것이 제1차 여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제1차 여수전쟁은 30만에 달하는 수나라 병사 대부분이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한 채
전염병과 폭풍우,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 패퇴하고 말았다.이후 문제사하고 양제가 즉위하여 다시 고구려 정벌의 의지를 나타내자 이것이 제2차 여수전쟁이었다. 아버지의 몇 문제가 엄청 알뜰했던 것과는 달리 아들 수양제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마치 자수 성공으로 절약이 몸에 밴 창업자와 아버지가 모아둔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재벌 2세와의 관계라고 할까? 물 문제가 몸에 밴 절약정신으로 충실한 국고를 수양제는 자신의 사치와 토목공사에 아낌없이 쏟아 붓다 보니 고구려 원정 준비에서도 스케일이 달랐다.
그는 113만 명에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문제는 고구려 원정에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것도 컸지만 양제는 그 3배에 달하는 군사를 일으켰다는 점이었다.물론 이 113만 대군이 모두 고구려 원정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요동 반도고구려와의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제는 호기롭게 고구려 요동 지방의 중심인 요동성과 다른 많은 성에 출병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되지 않고 피해만 누적되어 갔다. 그러자 수군과 육군으로 편성된 별동대를 조직하여 즉시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육로를 이용한 별동대에 비해 바닷길을 이용한 별동대가 먼저 평양성 대동강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지휘관인 내호아는 부지휘관인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로별동대와의 협공 없이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대파되고 말았다. 이처럼 수군의 별동대 전략은처음부터 지장이 생기고 말았다.반면 육로별동대는 모두 30만 5천 명의 군사로 육로를 통해 다른 성은 무시한 채 오로지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별동대 병사들은 출발 당시 100일치 식량과 방패,갑옷, 옷감, 무기 등 충분한 물자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별도의 중점을 두지 않아 병사 개개인에게 이 정도 물자는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결국 행군 도중 식량을 버리는 병사가 속출했고 곧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말았다.이러한 별동대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고 수나라 군영에 들어갔다.당시 을지문덕이 오면 잡으라는 양제의 밀명을 받은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려 했으나 위무사로 종군하던 상서 우승 유사룡이 이를 말리고 을지문덕은 유유히 적진을 보고 돌아갈 수 있었다. 뒤늦게 다시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넌 뒤였다.평양성은 아직 멀었는데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을지문덕을 잡아오라는 양제의 명령도 실패한 우문술은 돌아가려 했으나 우중문은 계속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결국 다시 평양성을 향해 나아갔는데, 그 과정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7번 이기고 7번 모두 이겼다. 연이은 승리에 자신이 생겼다수군은 어느새 청천강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치게 됐다. 그러나 수군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오로지 을지문덕의 계략이었다. 수군이 지친 기색이 역력함을 파악한 을지문덕은 일부러 진 체함으로써 수군은더욱 지친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결국 지친 수군은 평양성을 눈앞에 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는 희롱하는 시를 지어 보냈고, 우문술에게는 거짓 항복하고 만약 군대를 돌리면 왕을 데리고 행재소로 가보겠다고 했다. 굶주림에 시달려 평양성까지 행군한 대가는이 두 가지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후퇴의 명분은 되었으므로 수군은 군대를 돌려 압록강으로 향했다.수군이 돌아오는 길에 살수에 이르러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수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전투를 둘러싸고 수공에 의해 수군을 몰살시켰다고도 하는데요.그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수공이 되든 후미를 공격하든 지칠 대로 지친 수군이 혼미백산하여 겨우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 명 중 불과 2천 700명만이 남아 있었다니 수로서는 대단한 참패이자 고구려로서는 보기 드문 대승이었다.심한 참패에 격분한 양제츠는 우문술 등 주요 지휘관들은 모든 작위를 박탈하고 서민으로 만들거나 참수해 본대를 철수시켰다. 이처럼 고구려는 살수대첩의 승리로 수나라의 침략 의지를 분쇄시켰다. 이후 양결은 다시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으나고구려 정벌과 대운하 건설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고구려 원정 준비로 가장 고통받았던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반란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게다가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양제는 결국 강남 별궁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살수대첩의 결과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수나라가 고구려 사이에 살수대첩이 없었다면그래서 수나라가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고 하며, 서역과의 교류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나라는 당나라가 아니라 수나라가 된 것이 아닌가?출처_ (저서) 역사를 뒤흔든 전투들